거창군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오는 27일 1,400년 전 선화공주의 슬픈 이야기를 기리는 ‘아홉산 취우령제’가 열릴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아홉산 전경)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아홉산은 현재 거창읍·주상면, 마리면·위천면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
이 국경의 신라국 첫 마을은 거창읍 가지리 지내, 백제국 첫 마을은 마리면 영승마을로, 두 마을을 사이에 둔 산고개가 취우령(取雨嶺)이다.
현재 영승마을은 원래 두 나라 사신이 오갈 때 영접하고 보낸다는 뜻으로 영송(迎送)이었으나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처외삼촌이 살던 이 마을에 다니러 왔다가 마을이름 뒷 자 ‘보낼 송(送)자를 이길 승(勝)로 바꿔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취우령은 말 그대로 ‘비를 취하는 고개’라는 뜻으로, 오래전에 이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이 고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선화공주의 슬픈 전설은 어떤 이야기일까?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백제의 왕자 서동이 신라에 잠입해 선화공주에게 반해 아내로 삼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서동 왕자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결혼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일명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널리 불려지자 궁중에 까지 퍼지게 됐고, 서동의 계략인줄 모르는 진평왕이 크게 노해 선화공주를 궁에서 내쫓았다.
여기에서 설화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쫓겨나 갈 곳 없는 선화공주를 서동왕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에 태워 국경인 거창의 아홉산 취우령을 넘어 백제의 첫 동네인 영승마을에 내려 자신이 백제의 왕자라고 밝히고 수도로 데려가 무왕에 오른 후 선화공주를 왕비로 삼았다는 해피엔딩.
다른 한 이야기는 서동 왕자가 헛소문을 퍼뜨렸으나 선화공주를 얻지 못하고 백제로 돌아왔는데, 서동요 때문에 행실이 나쁜 것으로 오인돼 왕궁에서 쫓겨나 서동을 찾아 아홉산 취우령 국경을 넘다 영승마을 백제 수비대에 붙잡혀 첩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취우령’의 비(雨)는 선화공주의 죽은 넋이 눈물이 되어 뿌려지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런 선화공주 설화가 처음 채록되고 전해진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국경의 옛길을 찾아 복원하고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추념과 소통의 장을 준비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 ‘취우령 제례위원회’를 조직하고, 전정규 전 마을이장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취우령제를 준비중이다.
전정규 제례위원장은 “1985년 선친(고 전병수)이 처음 선화공주 이야기를 박종섭 경남도 문화재위원에게 제보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제 그분들의 뜻을 살려 선화공주 설화를 마을의 소중한 유산으로 잘 보전해 나가는데 애를 쓰겠다”고 말했다.
최초로 치러질 아홉산 취우령제는 영승마을 뒤편 취우령 소나무골의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던 곳에서 고유제를 시작하며, 마을회관 앞에서 선화공주 위패를 모시고 제례의식을 거행한다. 이후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장순향 한양대 교수의 진혼무가 이어진다.
오래된 국경의 도시 거창에서 1,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취우령 선화공주 설화는 삼국시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유되기도 한다.
선화공주 설화는 지금까지 서동요로 알려져 온 이야기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어 호기심을 자극할 매력적인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거창의 대표적이고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거창군은 ‘killer 콘텐츠’로서의 잠재력을 지내고 있는 ‘취우령 선화공주 설화’를 지난 5월 ‘아홉산콘텐츠 학술심포지엄’에서 제시된 방향에 따라 거창문학도시추진위원회, 거창역사문화콘텐츠개발원과 협력하여 거창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육성․개발할 계획이다.
거창인터넷뉴스원(gcinews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