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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문화예술 기사입력 : 2020/10/24
합천 해인사 소장 ‘건칠희랑대사좌상(乾漆希朗大師坐像)’ 국보 제333호 지정
희랑대사는 거창 주상면 희동마을 출신, 고려 왕건 도와 王師돼

 

1,000여년 전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 실물 그대로의 조각으로, 합천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999호 '건칠희랑대사좌상’이 10월 21일 문화재청의 심의를 통해 국보 제333호로 승격 지정됐다고 밝혔다.


고려시대 서기 900년도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희랑대사 조각상은 높이 82.2㎝, 무릎너비 60.7㎝ 크기다.


상(像)의 특징은 마른 몸에 결가부좌 다리 위로 양손을 포개 단정히 앉은 자세.

 

긴 얼굴에 넓은 미간, 오똑한 코, 뾰족한 턱, 큰 귀, 툭 튀어나온 울대뼈와 쇄골, 깊은 눈매, 이마와 눈가의 세 가닥 깊은 주름이 연륜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얇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져 너무나 사실적인 인자한 노스님 인상이다.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 기법(나무를 뼈대로 삼지 않고 모시나 삼베와 같은 헝겊을 여러 겹 바르고 옻칠을 거듭해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으로 구성했고,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다.


거기다 얼굴의 주름, 손등의 힘줄, 손가락 뼈마디 까지 실물 그대로를 표현한 건칠 기법의 장점이 제대로 살아있는 이 조각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으로,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인데다 실존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10세기 중엽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자 진영 조각의 진수라는 평가속에 예술 가치가 높게 매겨졌다.

 

특히, 천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사와 장삼에 쓰인 화려하고 과감한 색채나 피부에 쓰인 색의 변형이 거의 없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희랑대사가 우리에게 더욱 주목받는 것은 그가 바로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희동마을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주상면 성기리 희동마을에서 태어나 15세때 합천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 제3대 조사(祖師)를 지냈으며,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했고, 그 공으로 왕건의 스승이 됐다는 점이다.

 

주상면 성기리의 '성기'와 '희동(희터)'마을은 모두 희랑대사와 연관된 이름들이다.


'성기'는 원래 한자로 '星奇'였는데 왕의 스승을 배출한 '성인의 터'라는 뜻으로 '聖基'로 개명돼 현재까지 사용돼 오고 있으며, '희동(希洞.희터)'은 희랑대사가 태어난 마을이라는 뜻에서 '희(希)'자만 붙여 현재까지 사용돼 오고 있다.


거창지역에서는 지금도 희랑대사가 '주(朱)부치'로 불리는데, 이는 '주 씨 부처님'을 줄인 '주부처'의 변형된 호칭이다.

 '가야산해인사 고적'에 따르면 희랑대사는 신라 진성왕 3년(서기 88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17년(서기 966년) 77세로 입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희랑대사'란 명칭은 대사가 해인사 내 말사 희랑대(암자)에서 오래도록 정진수도한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희랑대(위 사진)는 현재도 건재하고 있다.

 

희랑대사가 역사적인 인물로 부각되는 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줘 왕건의 스승이 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가야산해인사 고적(古蹟)' 기록과, 희랑대사의 후예이자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인 균여(均如.서기 917~973)의 전기(傳記)인 '균여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서기 920년 말 고려 왕건이 경남 합천 미숭산에서 후백제 왕자 월광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전세가 불리해 지자 해인사로 들어가 당시 주지인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며 ‘비책’을 청했다.


이에, 희랑대사는 신병(神兵)인 용적대군을 보내 고려군을 도왔으며, 후백제 왕자 월광은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찬 것을 보고 두려워 항복했다.

 

희랑대사 도움으로 후백제군을 물리친 왕건은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해인사에 전답 500결을 시납하고 해인사를 중수하며,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후세의 분석으로는 희랑대사가 보냈다는 용적대군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해인사 소속의 승군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현재 해인사 벽에는 희랑대사가 용적대군을 부르는 그림도 그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희랑대사좌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물조각상에다 건칠기법에 의한 섬세한 표현, 완벽한 원형보존, 왕사(王師)라는 역사적 실존인물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거창인터넷뉴스원(gcinew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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