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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칼럼 기사입력 : 2021/03/16
거창의 봄, 정온 선생 생가의 파매(坡梅-파주매화) 이야기
구본용 (거창박물관장)

 

 

 

 

 

성큼 봄이 다가왔다.
기온차가 심해 봄기운이 다소 늦은 거창이지만 이곳저곳에서 매화, 산수유, 목련 등 봄꽃들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예전에는 개나리가 봄의 첨병 전령사였지만 요즘은 매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광양 매화마을 청매실마을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고 인근 산청의 유명한 삼매(三梅 - 산천재 남명매, 단속사 정당매, 남사마을 원당매) 영향이기도 하다.


양산 통도사와 구례 화엄사 홍매화도 빠지지 않는다.

 

                 ▲구례 화엄사 홍매화<2018. 4. 1. 촬영>

 

코로나 때문에 불안정한 시절이지만 이름 있는 매화에 대한 탐매(探梅) 이야기가 SNS상에 넘친다.


매화는 모든 생명이 잠들어 있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송죽(松竹)과 함께 변치않아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린다.


그 중 매화는 그냥 벗이 아니라 청우(淸友)·청객(淸客)이라 불렀으며 이른 봄에 피는 것은 고우(古友)라고 하고 봄철에 피는 것은 기우(奇友)라고 이름 했다. 


설중군자(雪中君子)라 일컬어지는 매화는 벗 이상의 것이 되기도 한다.
희고 맑은 꽃, 은은한 향기와 기이(奇異)하고 예스러우며 고아(高雅)한 나무 형태는 선비들이 삼고 있는 성리학의 이념과 군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눈 속에서 견디는 내한성과 다른 꽃보다 일찍 피는 성질은 매화와 군자가 공유하고 있는 덕이다. 

 

 

 

 

 

         ▲ 산청군 공식 블로그

 

우리나라에서 조선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 율곡 이이 등이 한결 같은 매화 애호가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매화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산천재 매화시  <남명 조식>
한 해가 저물어가니 홀로 지내기 어려운데    歲晩見渠難獨立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까지 내렸구나      雪侵殘夜到天明
선비 집은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했는데       儒家久是孤寒甚
매화가 피어나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    更爾歸來更得淸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  <퇴계 이황>
홀로 산 창에 기대서니 밤 기운이 찬데        獨倚山窓夜色寒
매화 가지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면           梅稍月上正團團
청하지 않아도 미풍은 불어와서               不修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온 뜰에 가득하누나.        自由淸香滿院開


또한 매화의 특성 때문에 저항의 상징성을 띠게 되어 일지매(一枝梅)가 의도의 표지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말과 한말에는 나라 잃은 우국지사의 절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육사의 광야에 등장하는 홀로 향기로운 매화가 그렇고 한용운의 매화 용자론이 그러하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 <광야>

  

                  ▲ 위천 강동 동계 정온 고택 파매坡梅<2021. 3. 14. 촬영>

 

우리 고장 거창에도 유명한 매화가 있다.


근래 점점 잊혀져 가고 있지만 위천 강동마을 동계 정온선생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 사랑채 앞 매화이다.


이 매화의 이름은 “파매坡梅” 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매화라는 뜻이다. 


당시 파주에 살던 용주(龍州) 조경(趙絅, 1586~1669) 선생이 동계 고택에 선물하여 심은 것이다.


당시 심은 나무는 고사하여 20여 년 그 자리에 지금의 매화를 다시 심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동계 정온 선생의 고고한 정신을 흠모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자 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주 조경은 동계 정온(鄭蘊, 1569~1641) 선생보다 17살 아래로 유년기에 거창 장팔리에서 살았으며, 동계 정온 선생이 모리재에서 돌아가시자 비문(碑文)을 지은 인물이다.

 

▲ 동계 고택 사랑채< 충신당이라 하며 매화옥이라고도 한다>


그 행적을 보면,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은 선조에서 현종 시기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정치적으로 남인의 입장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대내적으로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고,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후의 청나라)과의 사이에서 조선의 국제적인 긴장 관계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경은 84세 까지 장수하면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국내ㆍ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원칙을 직언(直言)으로 나타낸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조경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거창(居昌)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출사 대신에 은거의 길을 택한 것이다.
거창에서 은거를 할 때 조경과 친분을 맺은 인물이 허목(許穆, 1595~1682)이었다.


“미수 허목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왔으므로, 그와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몹시 친하게 지냈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모계(茅溪) 문위(文緯, 1555~1632)에게 학문을 배웠다.
문위는 산림의 학자로서 거창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으며,훗날 남인의 영수가 되는 허목과의 친분은 조경이 남인으로 인식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 사랑채 앞 매화<한창 피고 있는 중 2021. 3 . 14. 촬영>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누구와 심은 것인 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몇년 후 용주 조경이 동계 고택에서  분매한 매화를 다시 선물받고 동계 정온 아들 정창시에게 지어준 시는 용주문집에 전한다.


분매를 준 정명주<정창시, 동계의 아들> 에게 감사하며
〔謝鄭 鳴周 贈盆梅〕

 

며칠 밤이나 꿈속에서 서호를 그렸던가         / 幾夜西湖勞夢魂
오늘 저녁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에 홀연 놀라네 / 忽驚今夕剝柴門
아이 불러 막 잉어 삶으려 하는데              / 呼童政欲烹金鯉
잡은 손 놓으며 화분 들고 온 것에 기뻐하네    / 落手方欣帶月盆
석 자 그윽한 자태에 병든 가지 가련한데       / 三尺幽姿憐病榦
일 년쯤 살 뜻은 위태로운 뿌리에서 알겠구나   / 一年生意驗危根
봄 오면 처마 밑에서 웃는 모습 찾을 것이니    / 春來擬索當簷笑
인가의 화려한 복사꽃 자두 꽃 향하지 않으리   / 不向人家桃李繁


또한 매화가 있는 마당 사랑채에 “매화옥(某花屋)”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사랑채 ‘매화옥’ 현판


“매화옥某花屋”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추사와 동계 정온은 제주도 대정 에서 200여 년 차이를 두고 같은 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유배 후 위천 동계 고택을 방문하여 사랑채 이름인 “忠信堂(충신당)” 현판과 “某花屋(매화옥)” 글씨를 남겼다.


“某(모)”는 “梅매”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동계 정온 선생이 말년에 기거한 “某里齋(모리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

 

 

 

 

    ▲ 사랑채 충신당 현판<추사 김정희 작품>


남녁에는 매화가 절정을 지나고 있지만 남덕유산 아래 산골이라 동계 정온 고택 파매는 지금 막 피어나고 있다.


마침 올 해초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수목원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문화재 등록 민가정원 24곳을 ‘한국 민가 정원’ 발굴 지정했는데 ‘거창 동계종택’과 ‘거창 갈계리 임씨고가’ 2곳이 선정되었다.


코로나로 불안하고 우울한 시절이지만 조용히 매화를 찾아 맑고 고고한 기운을 받아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것도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거창인터넷뉴스원(gcinew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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