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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투고 기사입력 : 2013/03/15
(기고문)거창유림들의 친일단체. 조선유도회연합회 거창군 유도회
일제강점기 거창의 친일단체 1

1919년 3.1운동 뒤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고토(齋藤實)는 유생의 친일화 공작을 서둘렀다. 총독부에 등을 돌린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유생들을 이용하려는 공작이었다. 이에 대해 강동진은 “유생은 지방의 중소지주일 뿐만 아니라 명망가이자 유식층이며 또 합방후 관리로 취직도 못한 계층이기 때문에 배일감정도 세고 더구나 근대교육을 받은 많은 유생의 자제들은 반일운동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른바 황도유학(皇道儒學)이 대두되었다. 황도유학을 주도한 자들은 위유(僞儒)·부유(腐儒)들이었다. 황도유학의 출발은 성균관의 개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한국통감부에서는 성균관 학칙을 제정하여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개편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특수성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규정을 제정하여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했다. 경학원이 성균관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제학, 부제학, 좨주(祭酒) 따위의 조선시대 관직명을 사용했을 뿐 일개의 교화기관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종래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을 대제학으로 승격시키는 제스처를 썼으나 완전한 허울이었다.

 

 

개편 당시 일본 천황의 은사금 25만원과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케 했다. 경학원 규정에는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들어 경학원의 사무를 총리한다'고 돼 있었다. 총독부 교화기관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 뒤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13도에 강사를 두었다. 1913년 경학원 잡지를 창간했고 1930년 명륜학원을 경학원 부설로 개교했다. 경학원 잡지에는 일본인이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명륜학원의 초대 학감은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향교의 재산은 부와 군에서 관리하게 했다.

 

 

또 지방 향교를 거점으로 지방의 유림동태를 사찰했으며, 사상적 이탈이 없게 유림단체를 조직화하는 일을 병행해 나갔다. 따라서 경학원과 그 소속의 향교와 부설기관은 황국신민의 교화와 조선총독부 통치에 순응하는 사상선도에 앞장섰다.

 

 

이런 식으로 추진된 유교 통제를 왕도 유교 아닌 황도 유교의 측면에서 최종적으로 확립하려던 것이 1939년 11월 16일의 조선유도연합회의 탄생이다. 이 해 10월 15일의 석전제 이튿날(16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전조선 유림대회는 전선 유림의 통일기관 및 황도정신에 즉한 유도 진흥 기타를 결의했는데, 이 결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 조선유도연합회이다.

 

 

정무총감을 총재, 경학원 대제학 윤덕영을 회장으로 한 조선유도연합회는 도 지부 조직인 유도연합회 및 군 분회 조직인 유도회를 지역별로 두었다. 조선유도연합회와 그 산하 조직은 완전한 유림의 통합조직이면서 친일조직이 되었다.

 

 

이 시기 거창에서도 조선유도연합회 '거창군유도회'가 결성되었다.1940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거창에서는 2월 15일 거창읍 공립심상소학교에서 1읍 12면 유림대표자 60여명과 각계 관계자가 다수 모여 거창유도회를 결성하였다고 전한다.

 

 

거창군 내무주임의 개회사를 비롯하여 신용희의 취지서 낭독이 있은후 좌장으로 정태균(총독부 중추원 참의)을 선임하여 ▲회장 고병권(거창군수), ▲ 부회장 추지순일. 김병우. 신용직. ▲ 고문 정태균외 2인 ▲ 참여 웅곡신작. 김성창외 3인, ▲ 이사 임성희외 2인, ▲ 상임이사 하을춘. 송목의외 3인 ▲ 평의원 노태식외 2인, ▲ 서기 서진호외 2인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거창군유도회 결성에 참여한 인사들 중 정태균은 거창의 대표적 친일인사로 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경남도평의회 의원을 지낸 자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신용희는 일제강점기 거창읍장과 경남도평의회 의원, 여러 사회단체 임원을 역임하였고, 일제에 국방헌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에는 거창군 교육장을 다시 지내기도 하였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도회 결성에 참여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나라가 망했어도 선비의 지조와 충의는 끝까지 지켜야 할 도리이고 본분이다. 일제강점기 거창유림 대표자들의 이 같은 행태는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재원 (바른역사를 생각하는 거창시민)

 

(참고문헌 )

1. 경향신문, [한국사바로보기] 15. 황도유학파의 친일행각. 이이화

2. 동아일보, 1940년 2월 19일 기사 인용,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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