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 글) 거창법조타운 조성 갈등에 대한 단상

 

(옮긴 글) 거창법조타운 조성 갈등에 대한 단상

‘청개화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와 전문을 게재한다.

 

 

거창은 지금 교정시설 설립 문제를 놓고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교정시설 반대를 하는 사람들 입장을 살펴보려고 여러 각도로 접근해보고 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생각을 해보자.

교정시설에 수감되는 범죄자들 모두 어제까지 우리 곁에서 같이 숨 쉬고 웃고 슬픔을 함께 하던 이웃들이다.

수감된 사람들은 하늘이나 별나라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죄의 값을 치르는 이웃들이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죄를 지었거나

오랜 계획을 세우고 죄를 지었거나

죄를 짓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의 이웃이었고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받아들여야 할 이웃들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탈주범이 생기거나 형기를 마친 사람이 거창을 배회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교정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대전제를 놓고 찬성하는 사람들이나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 다시 한 번 더 진지한 고민을 해봤으면 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살고 있는 이름 모르는 누구도 몇 다리만 걸치면 내가 아는 사람들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고 하여 사회 구성원에서 배제시킨다면

그 사람들은 돌아갈 곳도 살 자리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끝은 악행으로 가는 길만 열어주는 것과 다름 아니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아주 위험한 집단을 양성하는 셈이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뉘우치게 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다독이게 하여 사회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교정시설은 단순히 죄 지은 사람들을 수감하여 형기가 끝날 때까지 가둬두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지은 죄를 뉘우치며 사회로 복귀하여 선한 이웃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죄 지은 사람들을 가족이나 친구, 인척, 사회 구성원 모두 외면하거나 방치 하는 일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 사람들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저 의미심장한 말로 넘길 게 아니다.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게 하거나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사회가 되면

그 사람들은 사람 모양을 한 흉기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죄를 지었다고 하여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희망마저 박탈하면

세상일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리는 즉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 속에서 위험한 결과를 만들 수도 있거니와

선한 이웃이라는 동시대인들이 먼저 인간 존엄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선한 사람들에게도 동시대인의 의무가 있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 죄를 지으라고 권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죄의 길에 들어서는 동안 동시대인들도 같은 하늘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 귀한 생명으로 태어났다.

운이 없게도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불우한 가정이 되어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이다.

그 사람들 중에는 사는 일에 허덕이다가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생활범죄나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하여

당사자에게만 잘못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런 지경에 이르도록 각자의 살길만 도모해온 우리 모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 기대고 싶거나 원망하는 동안 선한 이웃들은 제 살길만 찾고 있었다면 어떤 이들이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지켜본 즉 방관한 것과 같다.

동시대인들의 연대 책임이 크다.

물론 가난하거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지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이웃이라면 이웃의 불우한 형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웃의 불행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에는 우리 동시대인들의 연대책임이 있고 타인의 사정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서로가 따뜻한 이웃이 된다면 많은 범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범죄가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이웃을 외면하며 살고 있다는 반증이며

행복이라는 완장만 차고 표독한 경쟁 사회로 치닫고 있다는 반증이다.

날 때부터 누구는 교정시설에 수감이 되고 누구는 교정시설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살 것이라는 예정은 없다.

죄를 지은 범법자들도 날 때부터 머리에 뿔이 나있거나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 선한 이웃들을 범죄인들로 만드는 범죄 바이러스 보유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로 전제하여 교정시설을 반대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 지역에 교정시설을 세울 수 없다는 주장과

학교 가까이 교정시설을 짓게 할 수 없다는 논리는 우리 모두의 세계관을 제한하는 일이다.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수감하는 대표 시설인 교도소가 혐오시설이라는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혐오시설로 분류되어 있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시대에 따라 같은 내용이 달리 해석되고 달리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마치 중세에는 죽음보다 명예를 중시하던 때가 있었다.

이때는 명예를 손상당하면 명예 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죽게 되더라도 결투나 다른 방식으로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만큼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은 그러한가.

명예가 손상당했다고 하여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일은 없다.

적어도 우리 사회는 그렇다.

자아향성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입에 교도소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게 하거나 알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학부모들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 알아도 될 교정시설 이름이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게 해서야 되겠느냐며 분개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교정시설을 모르게 해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말을 듣고는 지금도 허탈하다.

그 정도의 인식으로 교정시설을 반대한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하고 있다.

아이들이 하고 있는 게임들 중 많은 게임들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것들이 많다.

이미 어른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예전처럼 어른들의 품 안에서 어른들이 주는 정보만으로 세계관을 형성하는 때가 아니다.

이번 교정시설 반대 운동을 통해 이러한 아이들의 위해 환경을 개선하려는 학부모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주변에 교정시설이 있거나 없다는 사실보다

어른들의 무관심과 선택적 이기심이 더 위험하다.

교정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정당성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정의로운 일도 아니다.

더구나 교정시설을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 지역에는 절대 교정시설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교정시설이 어느 지역으로 가든 그 지역에서야 반대를 하든 말든 내 알바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정시설을 반대하는 정당성이 우리 지역에 혐오시설이 들어서게 놔둘 수는 없다거나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저해될 것 같아서 혹은 안 오면 좋으니까 하는 것만으로는 약하다.

실현 가능한 대안을 내놓아야 이기적인 결집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정시설 건립에 반대하지 않으면 마치 토호세력 간의 야합이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투기를 위한 땅 사재기,

거기다가 보상을 많아 받기 위해 나무을 심어 반사이익을 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이는 이웃을 이간질하는 그러니까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개념도 없는

개발이익이나 노리는 무리들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정시설이 들어설 인근 마을 이장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하다.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인양 유포하고 있다면 실정법 위반이 된다.

그 사람 역시 죄를 짓는 사람이다.

사안이 중하면 고발조치 되어서 재판을 받고 심하면 어느 교정시설로 수감을 당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확인하지 않은 내용을 사실인양 공개적으로 퍼뜨리는 일은 삼가야한다.

이런 전개는 찬 ? 반을 떠나 거창사람들 모두의 공적이 되어야할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이 안된 내용을 퍼뜨려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이다. 덧붙여 교정시설 반대 입장이 아닌 언론은 관변언론으로 규정하고

그 지면에 게재하는 사람은 관변언론의 주구로 여기는 발언들 또한 지극히 유감이다.

교육도시 거창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려면

인근 군 단위 지역보다 학교가 많다는 숫자 우위보다

그 속에 있는 학부모들이나 우리 모두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철학과 사상적 기반이 튼실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느 사회나 이슈가 크든 작든 의견이 대립하게 마련이다.

나와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언행은 경계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교정시설 찬·반 기 싸움 이후 우리가 안게 될 후유증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찬 ? 반 양론을 펴는 도시가 아니라

누가 반대하고 누가 찬성하는 지 극명하게 드러나 이다음에 지역 사회에 남을 상처가 크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처럼 치닫는 다면 이런 우려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군정과 도정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민주 시민으로서 혹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라 치더라도

그 과정은 다른 입장의 의견과 결정과 행동을 존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긴 시간을 가지고 투쟁해야 할 사인이라면 더더욱 상대를 존중하며 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생기고 의견을 달리 하던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선명성 투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호 침투를 통해 바라는 일을 성사하려는 과정이므로

각자의 이미지를 반듯하게 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동지도 잃게 되고 동력도 떨어지게 될 것이다.

거창의 내일이 걱정된다.

이번 일로 서로 반목하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크다.

지금부터라도 정당한 주장과 행동은 하되

인신공격성 발언이나 사생활 공개나 공격, 그에 준하는 말과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앞으로도 거창에서 함께 살아야 할 우리 모두의 내일의 모습도 생각하면서 찬성하고 반대를 했으면 한다.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개념이 없다거나 무지하다거나 이권과 관계있는 식으로 매도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와 의견과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이 일을 접근했으면 한다.

거창에 교정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인간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부처님도 인간의 죄업을 풀어내고자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택하셨다.

선인·성자들 또한 인간의 선과 악을 어찌하는가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현세에 사는 우리는 어느 곳에 교정시설이 들어서더라도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 중 카톨릭 신자가 지나간다면

수감자들이 선한 이웃으로 돌아오도록 ‘화살기도’를 해주고

개신교 신자들은 그들대로 ‘사랑과 용서의 기도’를 하고

불자들은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선한 기운을 끊임없이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와 다른 종교인들도 혹은 무신론자들이라 하더라도 ‘감화의 기운’을 보내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장소를 떠나 그 안의 사람들이 선한 이웃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세상 모든 일은 절로 일어나는 게 없으며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하여 무관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연장한다면

우리 지역에 교정시설이 들어선다고 하여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거나 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성숙한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건강한 사회라면

우리 지역 교정시설에서 수형의 시간을 보내는 그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선한 이웃으로 만들 기회를 받았다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거창에서 수감 기간을 보낸 사람들은 모두 선한 이웃으로 돌아가게 하는 큰마음을 가지면 안되겠는가.

이런 마음을 가지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막는 것이 되는가.

교정시설을 막지 못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거창의 미래가 교정시설이 들어선다고 하여 미래가 암담해지거나

학부모들이 우려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거창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예로부터 거창은 타지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거창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이들을 건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였고 이들 또한 건강한 구성원이 되었다.

거창은 척박한 지형을 가진 곳이라 어려운 살림을 꾸려야했다.

그러한 척박한 지형이 지금은 도리어 청정거창으로 자긍하는 자원이 되었듯이 지금 반대하는 교정시설이 우리 거창사람들을 몇 높이 더 성숙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거창 사람들의 큰 특징인 ‘수용하는 마음’ 그 뜨거운 가슴을 믿기 때문이다.

 

                           4347년 8월 연화당에서

 

 

 

                        거창인터넷뉴스원(gcinews1@hanmail.net)